예로부터 문서나 서찰에 이름표를 찍어 본인임을 인증하는 수단으로 도장을 널리 사용해 왔다. 임금은 옥새를 통해 임금이 승인한 문서임을 알렸고 여러 기관에서도 관인(官印)을 찍어 문서를 확인하는데 사용했다.

흔히 알고 있는 도장이라고 하면 개인이 사용하는 도장일 것이다. 한글이나 한자로 이름을 새겨 넣어 도장 주인의 정체성을 알리는데 널리 쓰였다.

어렸을 적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부모님이 새 도장을 만들어 주곤 했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몇 번이고 찍어보며 새삼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때도 있었다.

요즘에는 부동산 거래나 금융 거래 등 도장이 쓰이는 곳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마저도 금융 거래에선 사인이나 카드인증 등이 자리를 꿰차며 어렸을 때 만들었던 도장이 어디있는지도 잃어버리고 살기도 한다.

도장은 그 사람을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에는 도장도 기계로 찍어내기 때문에 비슷한 모양들로 양산된다. 만약 이름이 같은 사람이 똑같은 기계로 도장을 만든다면 같은 도장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제는 거의 쓰임이 줄어든 도장이지만 ‘도장의 생명은 개성이다’란 일념으로 30년 동안 기계의 힘을 거부하며 손으로 도장을 만들어 온 이가 있다. 대전 태평동에 사는 정용배(75) 씨가 바로 화제의 주인공.

대전 은행동 목척교에서 하상도로를 따라 중앙시장쪽으로 가다보면 3.3㎡(1평) 남짓한 공간에서 도장을 깎는 할아버지를 볼 수 있다. 이곳이 할아버지의 일터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5살 때부터 대전에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손재주가 있어 눈대중으로 대충 보고도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을 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다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해보기로 하고 밑천이 많이 들지 않는 도장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2년 정도 자판을 깔고 장사를 시작하다 30여 년 전 지금 있는 곳에 터를 잡았다. 기계 없이 온전히 손으로 도장에 이름을 새기기 때문에 조각칼 대여섯 자루와 받침대 등이 도구의 전부다.

그의 작업과정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흔히 막도장이라 불리는 도장은 2~3분 내로 제작이 가능하다. 작은 나무기둥에 샤프펜슬로 대충 윤곽을 잡고 조각칼로 슥슥 깎아내면 어엿한 도장이 완성된다. 한자 이름도 문제가 없다. 복잡해 보이는 한자도 작은 도장 안에 빼곡이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렇다보니 할아버지는 걸어 다니는 옥편과도 같다. 실용한자로 쓰이는 웬만한 것들은 모두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 종일 좁은 공간에서 작업하는 일이 힘들 법도 하지만 도장 만드는 일이 언제나 새롭고 즐겁다는 할아버지다. 단순해 보이는 반복적인 작업이지만 이름도 제각각인 손님들이 찾아오면 처음 도장을 만들 듯 새로운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손님이 찾아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 사람의 개성을 도장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며 “도장 만드는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도장은 무엇보다 개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웃음 지었다.

이어 “지금보다 넓은 사무실에 옮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보면 손님이 늘게 되고 일을 소화할 수 없어 기계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서민들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도장을 만들어 주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유주경 기자 willowind@ggilbo.com